國政농단으로 주인을 팔아넘긴 '간신과 무당' 이야기


선주(先主) 유비(劉備) 초상화


[투데이코리아=이준호 기자] 정사·소설 삼국지(三國志)에는 황호(黃皓. ?~?)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유관장(劉關張) 삼형제와 제갈량(諸葛亮)의 활약으로 유명한 촉한(蜀漢)을 붕괴시킨 희대의 간신(姦臣)이다.

촉한의 황제 유비(劉備. 161~223)는 여러모로 박정희 대통령과 닮은 인물이다.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했으며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했다.

군무(軍務)에 있어서는 관우(關羽), 장비(裝備), 조자룡(趙子龍) 등 유능한 장수들을 기용해 오늘날의 북한에 비유될 수 있는 반란세력 위(魏)나라에 맞섰다. 내치(內治)에서는 제갈량을 등용해 민생(民生)을 안정시키고 국고(國庫)를 늘렸다.

촉한은 그러나 유비 사망 후 그 아들인 유선(劉禪)의 대에 접어들어 기울기 시작한다. 소설 삼국지에서 유선은 흔히 무능한 인물로 그려지지만 정사에서는 유비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영특한 인물로 묘사된다.

부친의 사망 이후 친부(親父)처럼 의지했던 제갈량마저 곁을 떠나고 동윤(董允), 장완(蔣琬), 비의(費禕) 등 능신들마저 차례로 죽음을 맞자 한 때 유비 못지않은 리더십을 보였던 유선은 큰 실의에 빠졌다.

위로는 위나라가, 옆으로는 오(吳)나라가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나라의 대들보가 뿌리채 뽑힌 상황이 됐기 때문이었다.

이 때 등장한 인물이 황호다. 환관(宦官. 내시)이었던 그는 갖은 감언이설(甘言利說)로 황제를 현혹하면서 부정축재(不正蓄財)를 일삼았다. 유선은 황호에게 국정(國政)을 일임하는데까지 이르렀다.

보다 못한 대장군 강유(姜維)가 여러차례 칼을 빼들고 황호를 죽이려 했지만 이미 그에게 흠뻑 빠진 유선은 황호를 변호하기에 바빴다. 강유는 결국 중앙정치에서 퇴출돼 변방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황호의 간신행위 중에서도 가장 '걸작'은 '무당'과 함께 국정을 농단한 것이다.

간신의 활개로 인한 촉한의 붕괴 조짐을 감지한 위나라가 본격적으로 촉한을 공격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권력실세였던 황호는 무당을 불러다 푸닥거리를 시켰다.

황호와 미리 입을 맞췄던 무당은 "천하는 태평하니 걱정하지 마시옵소서"라고 말했고, 유선은 이에 넘어가 안심한 채 여전히 국정을 등한시했다.


최순실(왼쪽)과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그러나 위나라의 명장 등애(鄧艾), 종회(鐘會)가 대군을 이끌고 잔도(棧道)와 산지를 넘어 진군해오자 그제야 위험을 알아챈 황호는 '간신스러운' 두뇌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로 '항복'이었다. 주인을 팔아먹고 자신은 홀로 살아남기 위함이었다. 등애 등 위나라 장수들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아챙겼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 때 변방이자 군사요충지였던 한중(漢中)에서는 강유와 같은 수많은 장수들이 목숨 걸고 위나라의 군대와 맞서싸우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돌연 "항복하라"는 성지(聖旨)가 내려오고 뒤이어 수도 성도(成都)가 함락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많은 장수들이 분노를 이기지 못해 후세에 깨끗한 이름을 남기고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황제를 부추겨 위나라 군대에 투항하고 촉한에서 벌어졌던 모든 패악(悖惡)의 책임을 황제에게 떠넘긴 황호였지만 사태는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등애는 당초 그에게 뇌물을 안겨 항복을 주장하도록 사주한 장본인이었지만 애초부터 간신 황호를 도륙할 마음을 품고 있었다.

위나라에서의 그의 지위를 인정할 경우 위나라도 촉한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황호는 주인을 팔아먹은 대가로 부(富)를 누리기는 커녕 등애에 의해 비참하게 처형되고 만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지근보좌했던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이 '최순실 국정개입 논란'과 관련해 입장을 돌연 바꾼 것으로 2일 알려졌다.

안 전 수석은 검찰 조사를 앞두고 측근들을 통해 "미르·K스포츠재단 설립 등은 대통령 지시를 받고 한 일"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다. 최 씨와 대통령 간 '직거래'를 주장해 자신은 혐의를 벗으려는 의도다.

작금(昨今)의 청와대 모습은 촉한의 그것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신하(안종범)가 국정을 농단하고, 여기에 무당(최순실)이 비선실세로서 개입했다. 위기에 몰리자 신하가 주인(대통령)을 팔아먹는 것도 같다.

배은망덕(背恩忘德)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인간이 보일 수 있는 가장 추악한 도덕적 행위 중 하나이자 정치·사회적 매장을 자초(自招)하는 행위다.

공자(孔子)는 "사람이 신용을 잃으면 설 땅이 없다"고 했다. 고대 로마의 희곡가 푸블릴리우스 시루스(Publilius Syrus)는 "신용을 잃은 사람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고 했다. 안 전 수석은 정녕 이러한 진리(眞理)를 모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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